이 이야기는 토익 810점에서 시작한다.
나는 빠른년생이라 학교를 1년 일찍 들어간 탓에 내가 도피성 영국워홀행 비행기에 올랐을 때 나는 고작 만 23살이었다. 생일 3일 후에 비행기에 올랐으니 갓 만 23살이 되었을 때였다.
나는 고등학교 때 이과 과목 중에서 생물만 유난히 잘했다. 항상 생물 I과 II에서는 1등급을 유지해서 친구들 사이에서 "생신 (생물의 신)"이라는 별명으로 불렸었다. 대학 전공으로 생물학을 선택한 것은 자연스러운 수순이었다. 그러나 나는 생물학으로 도대체 어떻게 밥을 벌어 먹고 살아야하는지, 취업이란 건 무엇인지에 대한 아이디어가 전혀 없었다. 내 내향적인 성격으로 영업은 못하겠고, 제약사 영업직에 대한 안좋은 소문만 무수히 들은 탓에 직무도 제대로 모른 채 그걸 하기 싫다는 것만 알았다. 직무라는 단어의 뜻에 대해서 알게 된 것도 영국 워홀이 끝난 후였으니 내가 얼마나 naive했는지 대충 설명이 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도대체 졸업 후 내 미래가 어떻게 되어야할지에 대한 그림이 전혀 없었다. 그저 시키는 공부를 열심히 하는 건 어떻게 저떻게 할 수 있었는데, 이제 내가 스스로 결정을 해야할 상황이 오니 뭘 해야할 지 몰라서 일단 친구들이 하는 걸 따라하기 시작했었다. 다들 토익이 필요하다니 토익 공부를 하고, 다들 경영 복수전공을 한다고 하니 나도 경영 복수전공을 하고, 내 인생은 그렇게 남들이 하는 말에, 남들의 손에 맡겨져 있었다.
한번도 영어를 좋아해본 적도 없고 잘해본 적도 없는 나는 강남의 유명 Y학원을 다녔다. 학교 선배를 통해 토익 준비반 선생님을 개인적으로 알게 됐는데, 선생님이 조교를 하는 학생한테는 수업료를 받지 않았나? 수업료를 싸게해줬었나 해서 다닐 수 있었다. 배치고사를 보고 선생님이 내 성적에 대해 "총체적 난국"이라고 했다. 내가 영어를 못한다는 사실은 놀라운 것이 아니었기에 그다지 상처를 받진 않았지만, 그래도 동기부여는 확실히 됐었다. 그래서 한달 바짝 공부하니 토익 810점이 나왔다. 토익 990점이 한트럭인 이 세상에서 810점은 대단한 점수가 결코 아니다. 누구보다 영어를 못했다고 자신할 수 있었던 내가, 영알못이었던 나 조차도 받을 수 있는 점수였으니. 하지만 이 점수는 이 모든 이야기의 시작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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