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처음에 content marketer로 입사했다.
회사가 R&D 하는 사람들을 주된 고객으로 삼다보니, 고객들의 research publications가 거의 testimonial이나 다름없고, 그렇기 때문에 우리 회사의 서비스를 사용해서 출간된 논문이 많을 수록 우리 서비스에 대한 신뢰도가 상승할 수 있기에 이런 논문들이 어떤 내용이었는지, 어떤 토픽을 다루었는지 등등을 audience에게 보여주는 것이 중요해서 내 입사 초반에 회사의 마케팅 전략 중 하나는 content marketing에 많은 공을 들이는 것이었다. 그래서 논문을 좀 더 이해하기 쉬운 형태로 설명해줄 사람이 필요했고, 소셜미디어에 대한 이해와 경험이 있으면서 생명공학을 전공한 사람을 찾고 있었다. 정말 나를 위한 포지션이 아닐 수 없었다.
Content marketing이 어느 정도 자리를 잡자, 내 작은 보스는 performance marketing을 해보는게 어떻겠냐고 물었다. 전에 관심이 있던 분야였고, 또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을 것 같아서 선뜻 하겠다고 했다. 논리적인 사고를 요하는 것, 데이터를 처리하고 insight를 도출해내는 것, 회사의 성장에 직접적이고 수치로 증명 가능한 기여를 할 수 있다는 점 (이런 정량적인 성과는 연봉협상에서 중요한 레버리지가 되기 때문에 당시에는 이런 task들을 선호했다) 등이 마음에 들었다. 회사가 전에 시도하지 않았던 다른 플랫폼들도 시도해봤고, 내가 이 task를 맡기 전보다 맡은 후에 광고 성과가 월등히 좋아졌다는 점들 덕분에 content marketing만 했을 때에 비해 회사 안에서 입지를 다지는 것이 훨씬 쉬워졌다.
전에는 이렇게 나를 define할 수 있는 직무를 가지는 것이 좋다고 생각했다. 그래야 이직을 할 때도 딱 키워드 하나만 가지고서도 포지션을 스크리닝 할 수 있고, 한쪽에서 튼튼한 경력을 쌓으면 나의 identity가 확실해지는 것이기 때문에 나에겐 어떤 타이틀이 어울릴까 생각하며 여러 직무들을 살펴보곤 했다. 그리고 그 당시에는 나의 성장을 크게 도와줬던 퍼포먼스 마케팅이 꽤나 유망하다고 생각했고, 너도나도 코딩을 배우길래 나도 퍼포머스 마케팅 쪽에서 data scientist나 data analyst 쪽으로 넘어가면 어떨까 하고 생각했더랬다.
그런데 앞으로의 커리어를 생각해보니 나는 전혀 퍼포먼스 마케터가 되고 싶은 사람이 아니었다. 하루 종일 컴퓨터만 보면서 일을 하는 것도 내 적성에 잘 맞지 않았고, 나는 내가 악기를 직접 연주하기보다는 전체적인 음악을 만들어내고 싶은 사람이었다. 또 나는 business acumen을 더 활용할 수 있는, 전략적인 사고를 하고, 적재적소에 사람을 배치해서 내가 달성하고자하는 목표를 달성하는 것에 더 많은 재미를 느끼는 사람이었다.
나와 내 보스는 정기적으로 회사 내에서 내 커리어와 성장에 대해서 논의하는 시간을 갖는데, 이 시간에 내가 내 커리어에 대해 느끼는 것들과 어떤 방향으로 가고 싶은지에 대해서 솔직하게 이야기하고, 회사가 가고자하는 방향에서 내가 디벨롭 하고 싶은 분야를 시도해볼 기회가 있는지 이야기를 나눈다. 그 때 나는 퍼포먼스 마케터가 되고 싶지 않다고 말했다. 나는 이 프로젝트가 다시 자리를 잡고, 순항하게 된다면 나는 다른 프로젝트를 받아서 새로운 것을 배우고 새로운 시도를 해보고 싶고, 그것이 또 자리를 잡게 된다면 이걸 잘 할 수 있는 다른 누군가에게 맡기고 나는 새로운 것을 하고 싶다고 했다.
누군가는 이것이 커리어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말할 수도 있지만, 난 이것이 "specialist의 커리어"에는 도움이 안될지라도, "generalist의 커리어"에는 분명 도움이 될 것이라고 믿는다. 링크드인에서 기업에서 높은 자리에 오른 사람들을 살펴보면 한 우물만 죽어라 판 사람들도 간혹 있긴 있지만, 많은 사람들이 여러 우물들을 두루두루 파고서도 높은 자리에 오른 것을 볼 수 있다. 또 물론 나는 커리어적으로도 성공하고 싶지만, 나의 궁극적인 꿈은 결국 내 회사를 갖는 일이며, 그러기 위해선 내가 무언가 하나를 잘 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것보다 무언가 하나를 잘 하는 사람들을 모아서 일을 성공시키는 능력이 더 중요하고, 나는 내가 직장생활을 하는동안 이런 스킬을 더 쌓고 싶다고 작은보스에게 말했다.
또 이렇게 특정 스킬이 직무의 주된 부분을 차지하는 쪽으로 커리어를 정하지 않은 이유중 하나는 AI 였다. 이런 대화가 오갔던 것은 ChatGPT 시대가 열리기 전이었지만, 이미 AI의 시대가 도래할 것이라는 이야기, 단순하고 반복적인 task나 숫자와 계산이 베이스가 되는 task는 나보다 컴퓨터가 더 잘할 것이라는 이야기는 이미 공공연한 사실일 때였다. 그 때 했던 생각 중 하나는 "그럼 AI의 시대에 내가,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은 뭐지?" 였고, 공장이 처음 들어서던 산업혁명 시절, 기계가 사람을 대체해도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것이 누구였는지 생각해보게 되었다. 그래서 기술을 터득할거면 기계를 개발하거나 기계를 고치는 기술을 터득할 것, 그것이 아니라면 기계가 있는 사업을 운영하는 매니징 포지션, 그것이 아니라면 자본가가 되어야한다고 생각했다. 이런 생각이 내가 어떤 기술을 하나 배우는 것보다 people skill, project management skill, presentation skill, negotiation skill과 같은 소프트스킬을 배우는 것을 더 중요하게 생각하게 된 계기가 됐다.
작은 보스와 함께 일하는 동안, 작은 보스는 내 커리어 방향성을 누구보다 잘 알고, "개인의 성장이 곧 조직의 성장"이라며 나의 개인적인 성장을 적극적으로 지원해줬다. 작은 보스의 든든한 서포트와 새로운 것들을 제안하고 의견을 수렴하는 것이 너무나 자유롭고 유동적인 작은 기업의 특성 덕분에 올해에도 어김없이 새로운 일을 맡게 됐다. 전에 하던 일들과 아주 다르진 않지만, 그래도 한번도 해보지 않은 일이고, 여러 마케팅 채널들을 통합하는 일이라 정말 기대가 된다. 그리고 이런 argument를 바탕으로 올해는 사실 예정에 없었던 한국 출장도 내가 먼저 propose해서 따내게 됐다. 나는 이러이러한 부분에서 이미 내 성과를 보여주었고, 이러이러한 부분에서는 그 누구보다 높은 성과를 낼 수 있으며, 나의 이런 스킬들을 활용하지 않는 것은 회사에 손해가 되는 결정일 것이라며 강력하게 어필했다. 덕분에 event marketing이나 key account management나 business development까지도 내 경력에 통합 됐다.
커리어 방향성을 정하는 법에 정답은 없다. 누군가에겐 퍼포먼스 마케팅이 적성에 잘 맞을 수도 있고, 누군가에겐 세일즈가 적성에 잘 맞을 수도 있다. 또 퍼포먼스 마케팅이 AI에 의해 위협받는 직업군이라고 한들 당장 하루아침에 이 직업이 없어지진 않을 것이다. 그리고 취업과 이직에서 늘 그러하듯, transferrable skill들은 직무가 바뀌어도 산업이 바뀌어도 사라지지 않는다.
다만 중요한 것은 그냥 가만히 앉아서 회사가, 사회가 정해둔 순서를 따라 흘러가는 것이 아니라, 내가 가고자 하는 방향을 알고 노를 저어가야 한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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