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처음 독일로 유학을 오고, 허름한 기숙사에 살기 시작했을 때, 생필품 조차 갖춰져있지 않던 내 기숙사 방의 문 안쪽에는 한 장의 종이가 붙었다.
"해외취업 2년 안에 할 수 있다"
내가 목표를 설정할 때는 두가지 유형이 있다. 첫번째는 진짜 각이란 각은 다 재서 내가 얼마나 승산이 있는지 파악한 후에 목표를 설정해서 무조건 성공하게끔 하는 유형이 있고, 두번째는 이와는 정 반대되는 유형이다. 그냥 아무 생각 없이 다짜고짜 "하고싶어서" 라는 이유로 목표를 잡는다. 내 해외취업에 대한 목표는 후자에 가까웠다. 뭔가 번듯한 플랜이 있었던 것은 아니었고, 그냥 나는 유학을 발판으로 삼아서 더이상 비자에 연연하지 않으며 해외생활을 하고 싶었다. 그래서 저런 문구를 종이에 매직으로 적어서 허름한 기숙사 방문에 테이프로 대충 붙여두었었다. 어차피 그 당시 내 방에 오는 사람들 중 한국인은 한명도 없었기 때문에 아무에게도 내 향후 2년간의 목표를 들키지 않을 수 있었다.
대충 적어놓아서일까 아니면 그냥 사람들이 의레 그렇듯 삶에 치여서 장기적인 목표가 시간이 지날수록 희미해져서일까, 방문에 붙어있는 갱지가 문을 여닫을때마다 손에 닿아서 닳아가는 속도보다 빠르게 이 목표는 내 머릿속에서 지워져갔다. 학교 수업을 따라가는 것 만으로도 굉장히 벅차고 힘든 하루하루를 보냈기 때문에 해외취업은 지금 당장, 급하게 처리되어야하는 문제가 아니었다. 졸업하고나면 어떻게든 되지 않을까 하는 안일한 생각도 한몫을 했다.
독일에서 취업을 하려면 아무래도 독일어가 필수라는 이야기는 귀에 못이 박히게 들었다. 영어는 배울 때 그렇게 재미가 있었고, 사실 지금도 새로운 영어단어나 표현을 배우면 기분이 좋다. 그런데 독일어에서는 도저히 그정도의 재미를 찾지 못했던 나로써는 독일에서의 취업을 위해서 독일어를 배우는 것은 참 고역이었다. 그래도 나름 노력을 한답시고 어학코스도 등록을 해보고 과외도 받고 했지만, 항상 지지부진하게 늘었다. 그리고 학업과 독일어를 병행하는 것은 정말 말도안되는 일이었다. 둘중에 하나는 포기해야했기에 나는 과감히 독일어를 포기했다.
그렇게 나는 졸업을 하게 됐다. 졸업을 위해서 필요한 것들만 도장깨기 하듯이 열심히 살았는데, 막상 되돌아보니 해외취업을 위한 것은 아무것도 준비되어있지 않았고 내 손에 들려있었던건 졸업장 한 장 뿐이었다. 운이 좋게도 졸업 후에 바로 논문을 썼던 실험실에서 프로젝트를 이어서 진행할 수 있는 기회가 있었고, 보통 이런 자리는 하프타임으로만 고용을 하는데에 반해, 나는 풀타임 제안을 받았다. 내가 뛰어나서라기보다는 그냥 우리 실험실에 사람이 없어서 인건비로 나갈 수 있는 돈에 여유가 있었기 때문이었던 것 같다.
아무래도 실험실이나 학계(academia)에서는 영어가 공용어이기 때문에 나의 부족한 독일어실력은 전혀 문제가 되지 않았다. 우리 교수님이나 테크니션들, 그리고 포스닥 한 명은 독일인이지만 나머지는 다 전세계 각지에서 온 인터네셔널들이었기 때문에, 독일어로 커뮤니케이션 할 일은 전혀 없었다. 하지만 실험실을 벗어나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아무리 글로벌 회사라고 할지라도 독일에 있는 지사에서는 독일어로 커뮤니케이션을 하는 경우가 많았다. 구인공고 자체가 독어로 올라오는 경우는 말할 것도 없고, 구인공고에 영어로 되어있다고 할지라도 항상 지원자격에는 "훌륭한 독일어 글쓰기 및 말하기 능력"이라는 문구가 빠지지 않았다. 심지어 독일에 본사를 둔 글로벌 회사가 아니라 미국을 비롯한 다른 영미권에 본사를 둔 글로벌 회사들 조차도 현지화를 위해서인지 독일어 커뮤니케이션능력은 지원자격에서 빠지지 않았다.
이런 상황에서 나는 독일어도 못하면서 취업을 해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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